한쪽이 애꾸눈이었던 한니발 장군이 하루는 화가를 불러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 화가는 한쪽 눈이 없는 한니발의 모습을 사진처럼 꼭 닮게 그려 주었다. 그러나 그림을 본 한니발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를 눈치 챈 신하들이 다른 화가를 불러 들였다.

이미 언질을 받은 화가는 한니발의 초상화에 애꾸가 아닌 정상적인 두 눈을 그려 넣었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본 한니발은 더욱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하여 세 번째 화가가 한니발의 초상화를 그리러 불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성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니발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흘렀다.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그 화가는 한니발의 얼굴을 정면에서 그리지 않고 눈이 정상으로 있는 쪽의 옆얼굴을 그렸다. 정상적인 눈이 있는 쪽만 그렸으니 거짓으로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아첨을 하기 위해 가짜로 꾸며 그린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한니발 장군의 초상화는 지금까지도 옆모습이 그려진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 사람의 얼굴은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한니발 장군의 초상화를 떠올릴 때마다 몇 가지의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첫째, 기왕이면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매력을 발견하고 싶다. 한니발의 초상화를 그린 세 명의 화가들 중에서 세 번째 화가의 패러다임을 갖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의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보고 싶다.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어두운 면이 있게 마련이다. 만일 한니발의 초상화를 정반대 방향에서 그렸다면 그의 눈은 애꾸눈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그렇게 상대방의 애꾸눈을 찾아내려고 안달하는 경우가 많다. 구태여 그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내어 당사자에게 상처를 주고 그늘을 드리우는 악역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하는 것이 도대체 누구에게 도움이 된단 말인가.

마치 한니발의 옆모습처럼 기왕이면 상대가 지니고 있는 가장 좋은 모습을 찾아보자. 상대방에 대해 가식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칭찬과 격려와 희망의 얼굴을 그려 줌으로써 밝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 되겠는가.

둘째, 오늘 하루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늘 새롭게 하고 싶다. 다 같이 공평하게 선물로 받은 하루 24시간이더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전혀 다른 하루가 된다. 마치 똑같은 한니발 장군을 보고 그린 세 명 화가의 그림이 제각각 달랐던 것처럼 하루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인드에 따라 하루 24시간의 그림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지닐 것이다.

매일의 일상은 자신이 직접 그려나가는 삶의 자화상이다. 자신이 원하는 가장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살고 싶은 하루를 살아야 한다. 어제의 그림과는 다른 오늘만의 고유한 삶의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스스로 변화하며 조금씩 더 새로워지고 성숙해질 수 있도록 창조적인 하루를 디자인해야 한다.

어제와 다른 내일을 꿈꾸는 사람은 오늘을 어제처럼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내일은 오늘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의해 결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한니발 장군의 초상화와 관련된 일화를 생각하며 나에게 주어진 하루 하루를 밝고 뜨겁게 살고 싶다.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소중한 오늘이 지금 나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생의 마지막 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소중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뜨겁게 살아가야 하겠다.